영화 왕사남 세조와 한명회,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 1500만 관객 돌파를 기념하며, 많은 분들위 궁금해 할, 이후 세조와 한명회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의 뒷이야기입니다.
관객 1500만 명. 극장가를 강타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가 마침내 그 숫자를 넘어섰습니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조선 최고 권력의 설계자로, 살아있는 전설처럼 등장한 한명회(유지태 분).
스크린 속에서 그는 음습하면서도 냉혹적인, 묘한 인간미를 풍겼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관객들은 저마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주인공 엄흥도에 대해서는 영화의 마지막 자막을 통해 소개되지만, 세조와 한명회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근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됐을까?”
여기서 말하는 ‘그 다음엔’이라는 말에는 세조와 한명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권선징악(勸善懲惡),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고사를 떠 올리며, ‘세조와 한명회는 처절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여러분들의 기대치을 밑돕니다.
이 글 말미에 왜 우리가 기대했던 천벌(天罰)이란 게, 존재할 수 없는지, 불교적 시각에서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칠삭둥이의 기적 같은 인생
한명회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출발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1415년, 태어나자마자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임신 7개월 만에 세상에 나온 극도의 미숙아였습니다.
온 집안이 “저 아이는 못 살겠다”며 손을 놓아버렸는데, 늙은 여종 한 명이 솜털 속에 싸서 정성껏 돌봐 기적적으로 살렸습니다. 거기서 ‘칠삭동이’라는 평생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칠삭동이, 외모도 영 아니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얼굴 위는 좁고 뾰족한데 아래는 턱이 넓게 퍼진 역삼각형이었고, 주먹코에 눈은 크고 사팔뜨기였다고 전해집니다. 잘생긴 배우 유지태를 캐스팅한 영화 제작진이 이 기록을 보았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외모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고아가 된 그는 개국공신 후손이라는 신분만 있을 뿐, 가난하고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머리도 총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시험에도 번번이 낙방했습니다. 서른여덟 살이 되도록 변변한 관직 하나 얻지 못한 낙오자였습니다. 그나마 얻은 첫 벼슬이 경덕궁직(敬德宮直), 오늘날로 치면 관공서를 지키는 말단 공무원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자존심만큼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당시 재상 황보인이 자기 딸을 한명회에게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 손을 번쩍 들고 달려갔을 것이지만, 한명회는 거절했습니다.
“처가의 권세에 힘입어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오만함일까요, 자존심일까요. 어쨌든 그는 자신만의 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회는 1453년에 왔습니다. 수양대군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조선의 장량”, 권력의 설계자
한명회가 수양대군에게 한 말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결단해야 할 때 바로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그 화(禍)를 입습니다.”
머뭇거리는 수양대군의 등을 떠민 말이었습니다. 수양은 그를 가리켜 “나의 장량(張良)”이라 불렀습니다. 장량은 한나라 유방의 최고 책사였습니다. 세조가 유방이라면, 한명회는 그 시대의 천재 전략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사 당일 살릴 사람과 죽일 사람의 목록, 즉 그는 살생부(殺生簿)를 직접 작성했습니다.
경덕궁직으로 일할 때 사귄 홍달손, 홍윤성 같은 무사들을 수양대군에게 소개해 병력을 모았고,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의 날 밤 직접 칼을 빼들고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에게 외쳤습니다.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죽는 것은 누구도 면할 수 없다. 사직을 위해 죽으면 그냥 병들어 죽는 것보다 낫지 않으냐!”
그 밤, 김종서와 황보인의 목이 잘렸습니다. 어린 단종은 실권을 잃었습니다. 조선의 권력 지도가 하룻밤 사이에 바뀐 것입니다.
이후 한명회는 그야말로 폭주했습니다. 영의정을 두 차례 역임하고, 공신 책록도 네 번이나 받았습니다. 정난공신·좌익공신·익대공신·좌리공신. 이렇게 공신 타이틀만 네 개를 달고 다닌 인물은 조선 역사에서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혼맥(婚脈) 전략의 달인이기도 했습니다. 딸을 예종(조선8대왕)의 왕비로 만들고(장순왕후), 또 다른 딸을 성종(조선9대왕)의 왕비로 만들었습니다(공혜왕후).
왕 두 명과 사돈이 된 것입니다. 손자 한경침은 성종의 딸 공신옹주와 혼인했습니다. 3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을 맺은 것입니다. 조선 역사에서 이런 집안은 없었습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狎鷗亭洞)이라는 지명도 그에게서 비롯됐습니다. 한명회가 “늙어서 갈매기와 벗하며 살겠다”며 한강변에 지은 정자 압구정(狎鷗亭)이 그 동네 이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명품 거리가 즐비한 강남의 압구정이, 조선 시대 최고 권력자의 정자 이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왠지 묘하게 어울립니다.
황혼의 권력자, 그리고 몰락의 씨앗
영원한 권력은 없습니다. 한명회도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1485년, 자신의 정자 압구정에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초대해 접대한 일이 문제가 됐습니다. 임금(성종) 몰래 외국 사절을 개인 별장으로 부른 것입니다. 탄핵이 빗발쳤고 모든 관직에서 삭탈당했습니다.
야사에는 이 소식을 들은 한명회가 도끼로 자신의 집 대들보를 내리찍었다고 전합니다. 분을 이기지 못해서. 평생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칠십 넘어 관직을 잃으니, 그 허탈함이 컷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성종은 끝까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병석에 누운 한명회를 위해 날마다 내관과 신하를 보내 문병하게 했고, 임종 직전에는 승지를 직접 보내 유언을 받아 적었습니다. 한명회의 마지막 말은 이랬습니다.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
권력자가 마지막에 남긴 말치고는 꽤 겸손합니다.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회한이 담긴 고백이었는지. 1487년, 향년 73세로 한명회는 눈을 감았습니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충청남도 천안에 안장되었습니다. 신도비도 세워졌습니다. 겉으로는 완전한 마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완전한 마무리란 없습니다.
죽어서도 목이 잘린 남자
1504년. 한명회가 죽고 17년이 지난 해였습니다.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왜 폐출되어 사약을 받게 됐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관여한 신하들을 하나하나 찾아 복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갑자사화(甲子士禍)입니다.
문제는 관련자들 중 상당수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산군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도 처벌할 방법이 있었습니다.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 목을 베는 극형이었습니다.
한명회는 폐비 윤씨 폐출 과정에 관여한 죄인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천안 수신면 속창리의 한명회 묘가 파헤쳐졌습니다.
그날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비가 쏟아졌습니다. 부관참시를 집행하던 병사들이 주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늘도 눈을 감은 것인지, 아니면 무덤 속 한명회가 분노한 것인지. 어쨌든 집행은 이루어졌습니다. 한명회의 시신은 토막 났고, 그 목은 한양 네거리에 걸렸습니다.
73세에 곱게 눈을 감은 조선 최고 권력자의 말로가, 무덤에서 끌려나와 한양 네거리에 머리가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년 후 중종 반정(1506년)이 일어나면서 연산군이 쫓겨났다는 사실입니다. 한명회는 곧 신원(伸寃)되어 복관(復官)되었고, 1507년에는 예관이 파견되어 재장사(再葬事)가 치러졌습니다. 세조의 묘정 배향도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죽어서도 부관참시를 당하고, 또 죽어서 복권된 셈입니다. 천안에 있는 그의 묘는 2000년에 도굴범들이 침입해 지석(誌石, 무덤 주인의 행적을 새긴 돌)을 훔쳐 갔다가 2009년에야 검거되었습니다. 죽어서도 편하지 못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세조는 어떻게 되었나, 업보는 피해가지 않는다
영화 속 수양대군, 훗날 세조(世祖). 그는 어린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사육신을 비롯해 수많은 충신을 죽였고, 동생 안평대군도 제거했습니다. 세종대왕이 그토록 아끼던 집현전 학자들을 처형하고 유배 보냈습니다.
권력은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시작됐습니다.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습니다. 침을 뱉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보니, 침이 닿은 자리에 종기가 생겨 온몸으로 번져갔습니다. 오늘날 의학으로는 건선(乾癬)이나 심한 피부염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세조 자신은 이를 업보(業報)로 여겼습니다.
세조는 불교에 의지했습니다. 특히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서 신미대사(信眉大師)를 스승으로 삼아 참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상원사에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두 가지 기묘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첫 번째 이야기, 계곡에서 사라진 동자
한여름의 오대산은 깊고 무더웠습니다. 세조는 신하들을 멀찍이 물리치고 상원사 아래 계곡으로 내려갔습니다. 임금도 혼자일 때는 그냥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종기가 온몸에 번진 몸을 계곡물에 담그며, 그는 잠시 왕이기를 잊었습니다.
그때 계곡 위쪽에서 동자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앳된 얼굴, 가벼운 발걸음. 세조가 불렀습니다. “얘야, 이리 와서 등 좀 밀어다오.” 동자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등을 밀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동자의 손이 닿는 곳마다 묵은 종기가 녹아내리는 듯 시원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살갗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세조는 괜히 뭉클해졌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권력자의 본능으로 말했습니다. “너, 오늘 여기서 왕을 만났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그러자 등 뒤에서 동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도, 문수동자(文殊童子)가 등을 밀어드렸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세조가 번쩍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동자는 없었습니다. 계곡물 소리만 흘렀습니다. 그리고 세조는 자신의 등을 더듬었습니다. 종기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세조는 서둘러 상원사로 올라갔습니다. 신미대사 앞에 앉아 계곡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신미대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세조는 화공(畫工)을 불렀습니다. 자신이 기억하는 동자의 얼굴, 표정, 그 눈빛을 하나하나 일러주며 그림으로 남기게 했습니다. 신미대사는 그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더니, 이번엔 목수를 불렀습니다.
단단한 나무를 골라 그 얼굴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강원도 평창 상원사 문수전에 모셔진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이 바로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조선 초기 목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히는 그 동자상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지금도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왕을 구한 고양이
며칠 뒤의 일입니다. 세조는 아침 예불을 드리러 상원사 법당으로 향했습니다. 계단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곤룡포 자락을 입에 물고 잡아당겼습니다.
세조는 걸음을 멈췄습니다. 짐승이 감히 임금의 옷자락을 무는 행동을 했으니 당장 쫓아버려야 마땅했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계곡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던 걸까요. 직감이 작동했던 걸까요.
세조는 시위 무사들에게 법당 안을 먼저 살피라고 눈짓을 보냈습니다. 무사들이 조심스럽게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곧 긴박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불상 아래 탁자 밑에 칼을 든 자객이 웅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고양이가 자락을 붙들지 않았다면, 세조는 그냥 법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자객은 그 자리에서 붙잡혔습니다. 세조는 법당 계단 아래에 멀뚱히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고양이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더니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선언했습니다. “이 고양이에게 상원사 사방 팔십 리의 땅을 내린다.”
신하들이 기겁했지만, 세조의 명은 명이었습니다. 그 땅은 이후 묘전(猫田), 즉 ‘고양이의 밭’이라 불렸습니다. 졸지에 조선 최대 지주가 된 고양이는 그 은공을 기리는 석물(石物)로 남겨졌습니다.
오늘날 상원사 문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양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마리의 돌고양이가 그 주인공입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묘하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지고 있습니다.
권력자의 말년, 참회와 병고 사이
이 두 가지 이야기에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세조는 계곡에서 동자를 만났을 때도, 법당 앞에서 고양이를 만났을 때도, 혼자였습니다. 신하들을 물리치고, 혹은 신하들보다 한발 앞서 멈춰 섰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임금이라더니, 세조의 말년이 꼭 그랬습니다.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그는 재위 내내 불안했습니다. 사육신의 처형 이후에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뒤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대산에서 신미대사를 찾은 것도,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도록 지원한 것도, 어쩌면 무거운 마음을 어디에라도 내려놓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재위 기간 나름의 치적도 남겼습니다. 경국대전 편찬 작업을 시작했고, 북방 방어를 강화했으며,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불경을 한글로 옮겼습니다.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이 백성들에게 좀 더 널리 퍼지는 데 세조의 불경 번역 사업이 한몫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세조는 1468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는 날까지 피부병의 고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 광릉(光陵)입니다.
오늘날 그 인근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원시림이 보존된 국립수목원이 있습니다. 권력과 살육의 대명사였던 세조의 무덤 주변이, 수백 년이 지나 가장 고요하고 울창한 숲이 되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불교적 시각으로 본 세조와 한명회
인과응보(因果應報)란,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으며 그 책임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 원칙대로 흘러가지 않는 듯 보입니다.
선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자가 번성하는 장면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불교는 이 의문에 윤회(輪廻)로 답합니다.
지금 이 생만 떼어놓고 보면 불공평해 보이는 일도, 전생부터 이어져 온 업보(業報)의 흐름 속에서 보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학자들의 시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이승을 영혼이 성장하기 위한 학습의 공간으로 봅니다. 고통도, 공포도, 심지어 살육조차도, 우리 눈에는 불합리해 보이는 그 모든 경험이, 사실은 이승에 오기 전 영혼 스스로 설계한 커리큘럼이라는 것입니다. 혹독한 수업일수록 영성은 한 단계 더 깊어진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왕사남, 역사가 영화보다 재미있는 이유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두 시간 동안 스크린을 통해 만난 세조와 한명회.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엔딩크레딧 이후에 펼쳐집니다.
과거 시험에 수십 번 떨어진 낙오자가 조선 최고 권력자가 됐다가, 죽은 지 17년 만에 무덤에서 끌려나와 목이 잘렸습니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군주가 계곡의 동자와 고양이에게서 위안과 목숨을 건졌습니다. 오늘날 강남 명품거리 압구정의 이름은 그 권력자의 정자에서 왔고, 가장 오래된 원시림은 그 군주의 무덤 곁에 자랐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드라마틱하고, 아이러니하고, 때로는 황당합니다. 영화가 아무리 잘 만들어져도 역사의 원본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1500만 관객이 왕사남을 봤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책을 펼쳐볼 차례입니다. 진짜 한명회와 세조의 이야기는 스크린보다 훨씬 두껍고,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훨씬 더 무섭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한 가지 권하고 싶습니다. 영화 한 편으로 불붙은 역사에 대한 관심, 거기서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국사는 생각보다 훨씬 흥미롭고,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습니다.
나이는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필자는 예순두 살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을 취득했습니다.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자극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격증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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