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순 화천군수, 군민과 함께 울고 웃은 50년 공직 인생
영하 20도를 가리키는 한겨울 새벽, 강원도 화천군 화천천 위에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두꺼운 점퍼를 걸친 그가 엎드려 얼음 구멍 속을 들여다봤습니다.
얼음 두께가 충분한지, 수위가 맞는지, 관광객 수만 명이 밟아도 안전한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의 귀에는 축구장 서른 개를 합친 면적의 얼음판 아래서 흐르는 물소리와 산천어가 유영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최문순 화천군수 이야기입니다. 군수라는 직함이 붙어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축제판의 야전 사령관이자 한 명의 안전 점검원이었습니다.
그것도 암 선고를 받은 몸으로…
2023년, 그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산천어축제 현장을 누볐고, 2026년 마지막 임기의 마지막 축제도 그렇게 몸소 지휘했습니다.
159만 명이 화천을 찾았습니다. 화천 인구의 70배가 넘는 숫자입니다. 외국인만 11만 4천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축제가 끝난 지 다섯 달 후인 2026년 6월 26일, 최문순 화천군수는 조용히 군수 자리를 내려놓았습니다.
50여 년의 공직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의 이야기입니다. 강원도 최북단 접경지 작은 고을의 군수가 어떻게 대한민국 지방행정의 역사를 새로 썼는지,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부 – 화천에서 태어나 화천에서 자란 사람
1954년 4월 4일, 최문순은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눈을 뜬 곳이 화천이고, 그가 마지막으로 공직 인사를 나눈 곳도 화천입니다. 그의 인생 전체가 화천이라는 이름을 품고 있습니다.
원천초등학교, 화천중학교, 화천실업고등학교(현 화천정보산업고등학교)까지 모두 화천에서 마쳤습니다. 그는 화천의 산을 뛰어다니며 자랐고, 화천의 강을 보며 청년이 되었습니다.
화천실업고를 졸업한 그는 대학 문을 노크하는 대신 공직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1977년, 스물세 살의 최문순은 9급 공무원으로 화천군 하남면사무소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 후 그의 공직 생활은 화천에서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화천군 간동면장, 화천군청 주민생활지원과장, 화천군청 기획감사실장, 강원도청 교육연구실장, 화천군 부군수. 직함이 하나씩 쌓일수록 그는 화천이라는 땅과 더욱 깊이 엮였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화천 하남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은, 돈이 없어 배움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학비를 내지 못해 시험지를 뺐긴 그 기억이 훗날 “돈이 없어도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린 시절의 결핍이 정책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화천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접경 지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북쪽으로는 북한과 맞닿아 있고, 군사분계선 너머의 긴장감이 늘 공기 속에 감돕니다.
인구는 고작 2만여 명, 면적은 넓지만 사람이 적고 기반시설이 열악한 전형적인 농촌 소멸 위기 지역입니다. 이런 곳에서 40년 가까이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군수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출세의 경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향 화천에 대한 의리이자,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무언가를 갚겠다는 결의입니다.
그는 퇴임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수로 취임한 순간부터 제 삶은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이 그냥 수사(修辭)가 아님을 그의 12년이 증명합니다.

2부 – 민선 6기, 새로운 화천을 그리다
2014년 6월, 최문순은 새누리당 후보로 화천군수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그해 선거는 조금 특별했습니다. 화천군수 후보 최문순과 강원도지사 후보 최문순이 동시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당적도 다르고(군수는 새누리당, 도지사는 민주당), 인물도 다르지만 이름과 한자까지 같았습니다. 화천 군민들은 투표장에서 두 명의 최문순을 만나는 기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도 화천 군민들은 자신들의 최문순을 정확히 찾아냈습니다.
군수가 된 그가 가장 먼저 내건 기치는 ‘아이 기르기 가장 좋은 화천’이었습니다. 이 단 하나의 비전이 12년의 군정을 관통했습니다. 처음에는 비웃음도 있었습니다.
인구 2만의 가난한 접경 지역에서, 대학 등록금을 전액 지원한다고? 세계 100대 대학에 유학을 보내준다고? 공공산후조리원을? 온종일 돌봄시설을? 비현실적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차근차근 하나씩 실현해 나갔습니다.
화천군은 화천인재육성재단을 설립하고, 군내 모든 대학생의 등록금 실납입액 전액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주비도 지원했습니다. 초등학생은 뉴질랜드로, 중학생은 영국 옥스퍼드 인근으로 어학연수를 보냈습니다.
해외 명문대 유학생에게는 유학비를 지원했습니다. 전국 최초로 지자체가 직영하는 초등 온종일 돌봄시설인 ‘화천커뮤니티센터’를 열었습니다. 공공산후조리원도 운영했습니다. 강원특별자치도 내 최초로 어린이 전용 공공도서관도 세웠습니다.
이 모든 정책은 하나의 철학에서 비롯됐습니다. “돈이 없어도 마음껏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최문순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결핍, 형편이 넉넉지 않아 공부를 포기해야 할 뻔했던 기억이 정책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숫자로 나타났습니다. 화천군의 합계출산율은 1.51명으로 집계되어 전국 3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소멸 위기에 처한 농촌 지자체가 저출산 대응의 전국적 모범 사례로 주목받은 것입니다. 최문순 화천군수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다.
“화천군 교육 정책은 이제 대한민국 지방정부가 배우고 싶어 하는 표준이 됐습니다.”
3부 – 민선 7기, 위기를 헤쳐 가며
두 번째 임기인 민선 7기(2018~2022)는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내부에서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2015~2016년 이·반장 체육대회 참가 주민들에게 식비와 교통비를 지원한 것이 선심성 행정이라는 혐의였습니다.
위 행사는 전임 군수때 시작된 것이지만, 1심에서 유죄(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2019년 항소심에서 무죄가 났고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그는 군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외부에서는 더 큰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화천을 강타했습니다. 지역 경제의 핵심인 화천산천어축제가 중단되었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창궐해 농가를 초토화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지역 안보의 상징과도 같던 육군 27사단이 해체되는 결정까지 내려졌습니다.
인구 감소로 허덕이는 접경 지역에서 군부대 해체는 단순한 군사적 조정이 아니었습니다. 지역 경제와 공동체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무거운 책임 앞에서 수없이 고민했고, 때로는 외롭고 말할 수 없이 두려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가 진정되자 다시 화천산천어축제를 재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글로벌 겨울축제’로 지정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위기는 때때로 사람의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최문순이 화천 군민들에게 보여준 것은 결코 굴하지 않는 뚝심이었습니다. 어떤 폭풍이 와도 그는 화천을 놓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부 – 화천산천어축제, 변방을 세계의 중심으로
최문순 화천군수의 재임을 논할 때 화천산천어축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산천어축제는 2003년에 시작된 행사로, 그가 군수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다 차별화시키고 글로벌 겨울축제로 탈바꿈시킨 것은 최문순 화천군수의 12년이었습니다.
그의 축제 운영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야전 사령관’을 자처했습니다. 1월의 엄동설한, 새벽빛도 들기 전에 얼음판 위에 나가 직접 안전을 점검했습니다. 수위 조절, 얼음 두께 측정, CCTV 모니터링, 제설 장비 점검까지 일일이 챙겼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행정가의 모습이 아니라, 군민을 지키겠다는 절박함에 가까운 책임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콘텐츠에도 끊임없이 혁신을 더했습니다. 핀란드 로바니에미의 산타를 초청하고 2016년에는 핀란드 체신청과 협약을 맺어 화천에 ‘산타우체국’을 개설했습니다.
중국 하얼빈 빙등 전문가들을 불러 실내얼음조각광장을 만들었습니다. 캐나다 퀘벡 윈터카니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야간 프로그램을 강화했습니다.
직접 세계 겨울축제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화천산천어축제를 세계 겨울도시시장회의의 네트워크에 올려놓았습니다. 그가 세계겨울도시시장회의 부회장을 역임한 것은 이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홍콩 등 매년 가을 겨울이 없는 나라를 찾아 산천어축제를 홍보했습니다. 군수가 직접 축제 전단지를 들고 관광 관계자들을 만난 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렇게 1천명 내외이던 외국인 관광객은 2026년 11만 4천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축구장 30개 면적의 얼음판 위에서 매년 100만 명 이상이 겨울의 낭만을 즐기는 축제가 된 것입니다.
그 경제적 효과는 직접 효과만으로 연간 1,000억 원을 넘습니다. 음식점은 관광객으로 넘쳤고, 지역 농업인들은 10억 원에 육박하는 농산물을 축제장에서 팔았습니다. 화천의 어르신들과 대학생들은 축제 운영에 참여하며 소득을 올렸습니다.
최 군수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건 단지 숫자가 아닙니다. “화천 군민들의 자존감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외지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을을 찾아온다는 것, 자신들이 만든 것을 세상이 알아봐 준다는 것. 그 자긍심이 화천 사람들에게 생겼습니다.
그의 마지막 축제였던 2026년 산천어축제. 열흘 넘게 한파특보가 이어지는 역대급 혹한 속에서도 159만 명이 화천을 찾았습니다. 그는 축제 마지막 날에도 얼음판 위를 누볐습니다. 암 투병 중인 몸으로, 마지막 인사를 얼음 위에서 했습니다.
5부 – 민선 8기, 새로운 도전과 마무리
2022년, 화천 군민들은 세 번째로 최문순을 선택했습니다. 3선의 무게는 달랐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뤄낸 사람이 또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기대와 의구심이 공존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두 가지 키워드로 마지막 임기를 설계했습니다.
파크골프와 기본소득.
파크골프는 아직 낯선 스포츠입니다. 골프와 비슷한 방식이지만, 비용이 훨씬 적게 들고 넓은 공간 없이도 즐길 수 있어 중장년층과 어르신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생활 스포츠입니다.
최문순 화천군수는 이 파크골프에서 화천의 미래를 봤습니다. 18홀 규모 파크골프장 5개를 조성해 연간 30만 명 방문객을 유치했고, 전국 규모 파크골프 대회를 잇달아 개최했습니다.
산천어 전국 파크골프 페스티벌, 암환자 전국대회, 기저질환자 전국대회까지 열며 ‘대한민국 파크골프 수도’라는 브랜드를 화천에 입혔습니다. 인구 절벽 시대에 ‘시니어 친화 스포츠도시’로 전환을 시도한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더욱 대담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는 정부의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지역 선정에 도전했고, 결국 화천이 선정됐습니다. 2026년 8월부터 화천 군민들에게 월 15만 원의 기본소득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현금을 나눠 주는 것이 능사가 아닐 수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공동체 전체가 기본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망을 구축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이 돈이 돌고돌아 화천의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구상입니다. 화천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임기 동안에도 그는 신혼부부와 어르신을 위한 공공주택 공급을 확대했고, 사내 교육캠퍼스 구축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공약 이행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SA를 획득했고, 이듬해에도 도내 군 단위 최고 등급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2026년 6월 26일. 500여 명의 군민과 공직자, 기관단체장들이 화천커뮤니티센터에 모였습니다. 공직 인사를 알리는 영상이 흘렀고, 꽃다발이 전달됐습니다. 감사패가 수여됐습니다. 그리고 최문순은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2014년 민선 6기부터 시작된 12년간의 군수직 수행 기간은 저에게 영광의 시간이기 이전에, 우리 군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바삐 생활한 시간이었습니다.”
6부 – 최문순 화천군수 암을 안고서도 멈추지 않은 사람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마음을 움직인 대목은 그의 질병 이야기입니다. 2023년, 그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직 임기가 3년이나 남아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의사는 쉴 것을 당부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크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최문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군정을 이어갔습니다. 암수술 직후인 2024년 산천어축제 현장을 직접 지휘했고, 2026년 마지막 축제도 얼음판 위에서 마쳤습니다.
강원일보는 그를 “암 투병 중에도 159만 명을 유치한 군수”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표현에는 경이로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편하게 입원하고 쉬면서도 군수직은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굳이 현장을 찾았습니다. 얼음 위에, 파크골프장에, 커뮤니티센터에. 그것은 아마도 그에게 화천 군민과의 약속이 생명보다 무겁지는 않더라도, 생명과 함께 지켜야 할 가치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퇴임사에서 “군수직은 행정 서류에 사인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 모든 사람의 삶을 가슴으로 품고 현장에서 돌봐야 하는 자리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그의 삶에서 나온 말임을 우리는 압니다. 말이 삶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삶이 말을 만든 것입니다.
7부 – 9급에서 군수까지, 공직이라는 길
최문순 화천군수의 공직 여정은 1977년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2026년 군수 퇴임으로 끝납니다. 50년입니다. 어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공직 한 길에 바쳤다는 것은 지금 시대에 매우 낯선 이야기입니다.
자주 이직하고,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한 지역에서 9급부터 군수까지 한 계단씩 올라온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입니다.
물론 그 세월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법적 소송도 있었고, 코로나와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재난도 있었으며, 군부대 해체의 충격,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따른 접경지역 주민 대피도 있었습니다. 암이라는 병도 왔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어려움을 슬기롭게 대처했습니다. 더리더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공무원 기간까지 합쳐 50여 년 가까운 공직 생활이 끝난다고 하니 아쉽기도, 홀가분하기도 합니다. 나머지 인생의 2막도 화천군과 함께할 작정입니다.”
50년을 화천에 바쳤는데, 은퇴 후에도 화천에 머물겠다는 말입니다. 그에게 화천은 직장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다짐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가난했던 소년이 돈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품었던 그 꿈을, 60년 가까이 가슴에 품고 살다가 군수가 되어 실현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계산이 아닌 진심에서 나온 것임을 그의 정책들이 보여 줍니다. 표가 되는 사업이 아니라, 아이들과 군민의 삶이 실제로 나아지는 데 집중했으니 말입니다.
8부 – 화천을 넘어, 대한민국 지방행정에 남긴 것
최문순 화천군수의 12년이 남긴 것은 화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인구 소멸 위기 지역에서도 창의적인 정책으로 활로를 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대학생 등록금 전액 지원, 초·중·고생 해외 어학연수, 세계 100대 대학 유학 지원, 지자체 직영 온종일 돌봄시설, 공공산후조리원, 파크골프 특화 도시 전략,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
이 중 어느 하나도 인구 2만의 접경지에서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씩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지획한 정책들 중 상당수는 지금 전국 여러 지자체가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온종일 돌봄, 지역 맞춤형 교육복지, 생활체육을 통한 관광 활성화, 지역 자원을 활용한 글로벌 축제 개발. 화천이 먼저 해냈고, 다른 지역들이 배웠습니다.
그것이 지방행정의 본질 아닐까요? 중앙에서 내려오는 지침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현실과 필요에서 출발해 지역에 맞는 해법을 찾아내는 것. 최문순 화천군수는 그것을 화천에서 보여 줬습니다.
에필로그 – 강이 흐르듯이
화천(華川). 이름 그대로 꽃이 흐르는 강의 고을입니다. 북한강 상류가 이 땅을 적시며 흐릅니다. 겨울이면 그 강이 얼고, 그 위에서 사람들이 얼음을 뚫어 낚싯줄을 드리웁니다. 산천어 한 마리를 잡아 올릴 때의 그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전국에서,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최문순 화천군수는 그 강처럼 흘렀습니다. 멈추지 않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거센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제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코로나가 왔어도, 소송이 왔어도, 암이 왔어도 그는 흘렀습니다.
퇴임식이 끝나고 그는 군청을 나섰습니다. 직원들이 배웅했습니다. 악수를 나누고, 눈물을 닦고, 박수가 울렸습니다. 1977년 9급 공무원으로 들어서던 그 공직의 문을 50년 만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화천을 떠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인생의 2막도 화천군과 함께할 작정”이라 했으니. 이제 그는 군수라는 직함 없이 화천을 걸을 것입니다. 얼음판 위를 걷던 그 발걸음으로, 이제는 이 강변을 따라 걸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지방행정의 역사에는 화려한 이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9급으로 시작해, 50년을 한 길로 걸어와, 아이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하는 세상을 만들고 퇴임한 군수의 이름은 지방자치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입니다.
몇 억 원의 예산, 몇 개의 사업, 몇 명의 관광객… 행정은 시간이 지나면 숫자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숫자보다 사람을 기억합니다.
- 누가 어려울 때 손을 잡아주었는지,
- 누가 아이들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는지,
- 누가 주민들과 함께 웃고 울었는지를 기억합니다.
화천에서 아이를 키운 부모들은 등록금 걱정이 없었던 시간을 기억할 것이고, 돌봄시설을 이용했던 아이들은 따뜻한 보살핌을 떠올릴 것입니다. 산천어축제를 찾았던 관광객들은 겨울 화천의 활기를, 파크골프장을 찾은 사람들은 새로운 도시의 변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최문순 화천군수님,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