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n이슈화천소식

자유는 공짜가 아니었다, 화천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이 전하는 이야기

이 칼럼은 화천 파로호 안보전시관 옆에 우뚝 서 있는 화천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이 탑에 담긴 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금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이름을 가진 이 거대한 수면 앞에 서면, 누구나 잠시 숨을 고르게 됩니다. 강원도 화천군에 자리한 파로호는 1951년 봄, 중공군 수만 명이 수장된 격전의 현장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파로호’라는 이름을 하사했을 만큼, 그 전투의 의미는 한국전쟁사에서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파로호 안보전시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른쪽을 바라보면,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탑 하나가 조용히 서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날렵한 석탑. 계단 위에 우뚝 솟은 그 탑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개 6·25 참전 용사들의 위령탑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립니다. 안보전시관이라는 공간적 맥락 위에서 그렇게 짐작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탑 앞에 새겨진 안내문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순간, 그 짐작은 산산이 흩어집니다. 이 탑은 국군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탑이 아닙니다. 군복을 입지 않았던 사람들, 총을 든 군인이 아니었던 사람들, 그러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평범한 지역 주민들의 영혼을 모신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안내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탑은 1950년 6·25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인민군에 의해 살해된 반공민간인(지역주민) 영령들을 봉안하고 해마다 10월 위령제를 봉헌하기 위해 1996년 10월 28일 세워진 위령탑이다.”

1996년. 전쟁이 끝나고 무려 43년이 흐른 뒤에야 이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이 세워졌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탑에 모셔진 영령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 속에 잊혀 있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화천, 전쟁 이전에는 이북 땅이었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화천이라는 땅의 지리적, 역사적 위치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날 강원도 화천군은 대한민국의 영토이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화천은 북한 땅이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화천은 38선 이북에 위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할 지역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화천 주민들은 해방 직후부터 이미 공산 체제 아래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공산 치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화천 주민들은 추상적 이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살갗으로, 뼈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토지는 몰수되었고, 신앙은 탄압받았으며, 지주나 유력 인사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 이동의 자유 같은 것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라는 단어가 체제 선전의 수사가 아니라 피부로 절실하게 느껴지는 결핍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 땅에서 5년 남짓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남침 개시는 단순히 전쟁의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억압의 체제가 남쪽으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 체제의 확장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절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파로호 안보전시관 옆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파로호 안보전시관 옆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치안대, 총을 든 농부들

전쟁은 초반부터 파죽지세로 진행되었습니다. 북한 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화천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는 순식간에 전선의 한복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혼란 속에서, 화천의 일부 민간인들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치안대를 결성했습니다. 치안대(治安隊). 말 그대로 지역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입니다.

총기도 변변치 않았고, 군사 훈련도 받지 못했으며, 군복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산 체제 아래서 살아보았기에 체득한,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뼛속 깊은 확신이었습니다.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안내문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인민군에게 항전하며 지역의 치안과 질서유지를 위해 결성된 치안대원들이거나 일진일퇴하는 우리 국군의 작전을 돕다가 학살된 민간인 반공투사들이다.”

‘일진일퇴하는 국군의 작전을 돕다가.’ 이 짧은 구절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전쟁 초기, 전선은 하루가 다르게 움직였습니다. 국군이 진격하면 해당 지역은 수복되고, 인민군이 반격하면 다시 빼앗겼습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지역 지리를 손바닥처럼 아는 민간인들은 국군의 소중한 자산이었습니다. 어느 산길이 적에게 노출되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지, 어느 마을에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는지, 어느 주민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이런 정보는 작전의 성패를 가를 수 있었고, 민간인 협력자들은 기꺼이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처절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 그리고 두 번째 공포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극적으로 역전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빠르게 북상했고, 10월에는 압록강 인근까지 밀고 올라갔습니다. 화천도 수복되었습니다. 치안대원들과 그 가족들은 마침내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채 두 달을 가지 못했습니다.

1950년 10월 말,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이 대규모로 한국전쟁에 개입했습니다. 수십만의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밀려왔고, 유엔군은 급격히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1년 1월 초, 서울이 다시 함락되었습니다(1·4후퇴). 화천 역시 다시 공산군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벌어진 일이 이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의 핵심적인 역사적 배경입니다.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도왔던 치안대원들, 지역 정보를 제공했던 민간인 협력자들, 공산 치하에서도 비협조적 태도를 보였던 주민들, 이들은 이제 인민군과 공산 당국의 ‘반동분자 색출’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비극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가장 힘없는 민간인에게 가장 잔혹하게 닥칩니다. 군인은 포로가 될 수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민간인에게는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즉결 처형이 자행되었고, 가족 단위로 학살이 벌어졌으며,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생사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안내문에 적힌 숫자가 이를 증언합니다.

“이 탑에 모셔진 영령들의 수는 202명이나 행방불명 등 미확인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3백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화천군 인구가 2만 명 조금 넘는 소읍에서, 300명의 민간인이 이념을 이유로 희생되었습니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전율이 입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아버지를, 형제를, 이웃을 잃은 상처가 새겨졌을 것입니다.

자유는 이념어가 아니었다

오늘날 ‘자유수호’라는 표현은 종종 특정 정치 세력의 구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진영 논리 속에서 소비되고, 때로는 반대편을 공격하는 정치적 언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처음 접하는 세대는 낡고 경직된 냉전 시대의 언어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화천의 이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앞에 서서 안내문을 읽노라면, 그 단어가 얼마나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이 탑에 모셔진 분들에게 자유는 이념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경험이었습니다.

자유가 없을 때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직접 겪어본 사람들의 언어였습니다. 밤에 불시에 들이닥치는 인민군의 발소리, 한마디 말 잘못하면 가족 전체가 위험에 처하는 공포, 누가 나를 고발할지 모른다는 의심의 안개 속에서 이웃과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일상, 그런 삶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자유는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숨 쉬고 싶은 공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군인이 아님에도 총 앞에 섰습니다. 치안대를 조직했고, 국군을 도왔으며, 공산 당국의 협조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로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인류 역사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자유를 위해 싸운 민간인들의 이야기는 늘 정규군의 영웅담 뒤편에 조용히 묻혀왔습니다. 훈장도 없고, 계급도 없으며, 기록도 불충분한 채로…

화천의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역시 그런 역사적 망각에 대한 뒤늦은 응답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43년이 지난 1996년에야 세워졌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이 희생이 얼마나 오랫동안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는지를 말해줍니다.

가족을 지키느냐, 신념을 지키느냐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이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에 모셔진 분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의 선택이 가족 전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공산 치하에서 민간인 협력자에 대한 ‘연좌제’ 식 보복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반동분자로 찍히면, 그 배우자와 자녀, 심지어 형제까지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택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 선택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북한 협력을 선택한 사람들을 비겁하다고 할 수 없고, 끝까지 저항하다 희생된 사람들만을 영웅시하는 것도 단순한 시각일 수 있습니다. 전쟁의 비극은 옳고 그름의 경계가 생존의 논리 앞에서 무너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극한의 조건에서 자유와 신념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어떤 시각으로 보더라도 경이롭습니다. 오늘 내가 이 자유로운 땅에서 숨 쉬고, 이 글을 쓰고, 이 탑을 방문할 수 있는 것이 어쩌면 그 선택들의 누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가슴 한켠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명의 희생자들, 그리고 역사의 부채

대한민국 현대사는 오랫동안 ‘기억의 불평등’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기억은 주로 군인의 영웅담, 특정 전투의 승리, 지휘관의 결단 같은 이야기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왔습니다.

민간인의 피해, 그중에서도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은 역사의 각주 아니면 통계 숫자로 처리되기 일쑤였습니다. 화천의 반공민간인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은 그 불균형에 대한, 아주 늦고 조그마한 수정입니다.

202명의 이름이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에 새겨졌고, 매년 10월에는 위령제가 열립니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이 탑 앞에 모여 묵념을 올립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파로호를 찾는 방문객 중에 이 탑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안보전시관이 있고, 파로호 전망대가 있으며, 인근에는 딴산, 수달길 등 명소가 있습니다.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은 주차장 한쪽에 조용히 서 있을 뿐입니다. 그 쓸쓸함이 어쩌면 이 탑이 상징하는 역사적 진실과 어울립니다.

자유를 위해 죽어간 민간인들은 생전에도, 사후에도 조용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전쟁사 책에 등장하지 않고, 그들의 용기는 교과서에 서술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용기가 없었다면, 화천의 수복도,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도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화천이 자부하는 것의 의미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안내문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래서 3만 화천군민은 이 고장이 반공호국의 선봉지역이요 국가안보의 상징지역임을 자부하고 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자칫 지역 자긍심의 과장된 표현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적 맥락 위에 놓고 보면, 그 자부심은 뿌리가 있습니다. 화천은 전쟁 전부터 공산 체제를 경험한 땅이었습니다.

전쟁 중에는 치안대원들이 피로 저항했고, 전쟁 후에는 그 희생을 기억하는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이 세워졌습니다. 파로호에서는 중공군을 대파한 대첩이 있었고, 그 전투의 기억은 지금도 안보전시관에서 살아 있습니다.

화천을 단순히 강원도 산골의 작은 군(郡)으로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현대사의 굴곡 위에 놓고 보면 이 땅이 치른 대가가 얼마나 혹독했는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 위에서 오늘의 화천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서 있습니다.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앞에서 해야 할 질문

요즘 세대에게 자유민주주의는 주어진 것입니다. 태어나보니 이미 거기 있었습니다.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으며,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고,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당연함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그것이 지켜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렀는지를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화천 파로호 주차장의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은 그 실감의 단서 하나를 조용히 쥐어줍니다.

군복도 없었고, 계급도 없었으며, 훈장도 받지 못했지만, 치안대 완장 하나 차고 인민군 앞에 섰던 사람들. 국군이 지나갈 산길을 안내하다가 반동분자로 몰렸던 사람들. 공산 당국의 협조 요구를 거부하다가 가족과 함께 몰살된 사람들.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채 행방불명된 사람들.

이들이 없었더라면 오늘 내가 이 자유로운 땅에서 이 글을 쓰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 탑 앞에 서서 묵념을 올리는 것은 단순한 추모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 나는 지금 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 자유를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기억이 멈추는 곳에서 역사도 멈춘다

화천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파로호의 풍광도 좋고, 안보전시관의 전시도 뜻깊습니다. 그러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 오른쪽의 그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으로 먼저 발길을 옮겨보시길 권합니다.

안내문을 천천히 읽어보고, 202명이라는 숫자를 가슴에 새겨보고, 잠시 묵념을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기억이 멈추는 곳에서 역사도 멈춥니다. 그리고 역사가 멈추는 곳에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위험에 처합니다.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이 주차장 한구석에 조용히 서서 전하는 메시지는, 사실 아주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공짜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이 자유수호희생자위령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숭고한 희생자분들]

(화천읍) – 가나다순, 존칭을 생략했습니다.
고상주, 길기홍, 길명식, 길명욱, 길양식, 길후재, 김경화, 김기수, 김년선, 김년호, 김봉규, 김봉만, 김봉섭, 김병철, 김성모, 김수남, 김수학, 김원식, 김윤석, 김인석, 김영태, 김종모, 김종호, 김창규, 김창석, 김태순, 김현순, 류흥식, 박부길, 박봉독, 송학봉, 안봉간, 오세녀, 윤기정, 여호열, 이만백, 이만송, 이순교, 이순경, 이동술, 임해수, 장기열, 장기춘, 전영곤, 전영운, 전연진, 정기연, 정병욱, 조남태, 조남형, 조추원, 주백룡, 주영국, 주영남, 채수각, 채수구, 채수민, 채수완, 채유석, 최군일, 최봉열, 한덕준, 한인봉, 한인준, 한인필, 한용문

(간동면)
김금룡, 김보선, 김상림, 김영배, 김용욱, 길병용, 길병창, 박광한, 박종영, 박희순, 박흥도, 방금산, 송문석, 송제성, 송제연, 안재동, 오근환, 오봉환, 오세응, 오익환, 오일선, 오춘근, 오흥도, 윤원상, 장진규, 정일화, 황용진, 황환교, 황흥근

(하남면)
강추돌, 강춘성, 길명묵, 길명열, 김명기, 김운성, 박만천, 박종학, 서춘택, 손득준, 손영덕, 손차준, 신흥조, 우종윤, 우흥백, 유동열, 이용원, 이근채, 이복만, 이승춘, 이종관, 이천성, 최대철, 최동국, 최동만, 최동수, 최동안구, 최동일, 최동학, 최용구, 홍순덕

(상서면)
길희옥, 김계순, 김만복, 김만식, 김문성, 김성근, 김성신, 김성준, 김시옥, 김언니, 김재갑, 김종모, 김지봉, 김태순, 김한명, 류장영, 문왈길, 송규석, 송기준, 송명식, 송병순, 신정, 유동준, 유신, 이구영, 이도연, 정병욱, 정유수, 정종설, 정태순, 최관실, 최운범, 최학준, 황한성

(사내면)
고우락, 권복용, 권인택, 길명운, 길복성, 길순배, 길은준, 길종환, 김경호, 김도엽, 김만엽, 김병호, 김선봉, 김순길, 김순길, 김순찬, 김용복, 김용제, 김은겸, 김창엽, 남기찬, 박두흥, 박병헌, 박순기, 백부전, 서경준, 연경조, 윤기녀, 윤석기, 윤필여, 이계림, 이교영, 이금옥, 이성근, 이영로, 이택준, 이학인, 이흥로, 정승관, 정은례, 최경룡, 함창호, 현보배

[위령탑 건립에 참여한 분들]

(유족 및 주민)
화천읍 상리 최주환
화천읍 풍산리 유준영
화천읍 아리 한종호
화천읍 하리 방응봉
화천읍 동촌리 장기윤
간동면 유촌리 리근수
하남면 용암리 길성준
하남면 삼화리 이봉득
상서면 부촌리 최태조
경기도 일산시 신현수

(한국자유총연맹)
화천군지부장 : 박정구
화천군부지부장 : 권충기
사무국장 : 홍재명
운영위원회 : 이화원, 이화영
위원 : 안경호, 신상철, 이병우, 전영도, 문동호, 송원석, 박원춘, 이동일, 서진암, 이용인, 이정택, 김정문, 이근호, 유용선, 길현배, 김덕일, 이영천
읍면지도자위원회 : 화천위원장 최흥배, 간동위원장 홍순호, 하남위원장 오세봉, 상서위원장 박무춘, 사내위원장 김종수

  • 위에 소개한 성함 중 틀린 부분이 있다면 필자에게 연락 주세요. 즉시 정정하겠습니다! 【화천인사이트 발행인, Publisher@hwacheon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