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의 ‘산천어 축제에 대한 복잡한 분노’에 대한 반박
2025년 12월 26일 한겨레 신문은 ‘산천어 축제에 대한 복잡한 분노‘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글은 그들의 논리에 대한 반박입니다. 한겨레의 말장난 같은 기사는 감정은 정교하지만 기준은 일관되지 않습니다. 이 글은 그 불일관성을 세 가지 비유로 드러내고자 보고자 합니다.
첫째, 바다에서 어부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논리
둘째, 그물로 멸치떼를 잡아 가마솥에 삶아 말리는 논리
셋째, 유료 낚시터에서 양식어를 풀어 낚시객을 받는 논리
이 세 장면을 통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산천어 축제가 ‘학살’이라면, 위 셋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셋이 허용된다면, 산천어 축제만을 ‘도덕적 재앙’으로 지목할 논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1. 그물의 논리, 바다 어업은 왜 학살이 아닌가
먼저 가장 기본적인 장면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동해든 남해든, 새벽녘 항구를 나서는 어선은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갑니다. 그물은 선별적 도구가 아닙니다. 크고 작은 물고기, 때로는 목표가 아닌 종까지 함께 걸립니다. 어부는 그물을 끌어올리고, 그 안에서 수천, 수만의 생명이 공기 중에 노출됩니다. 이 중 상당수는 바로 죽고, 일부는 죽어가며, 일부는 다시 바다로 던져집니다.
이 장면을 우리는 “학살”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가?
- 산 채로 공기 중에 노출되어 질식하는 과정은 폭력이 아닌가?
- 개체 수 조절이나 생태 균형이라는 명분은, 산천어 축제에 적용되면 왜 갑자기 무효가 되는가?
만약 고통의 강도와 죽음의 수량이 도덕 판단의 기준이라면, 바다 어업은 산천어 축제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의 ‘학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 가마솥의 논리, 멸치떼는 왜 윤리적 논쟁의 대상이 아닌가!
두 번째 비유는 더 극단적입니다. 멸치입니다.
멸치는 대개 낱마리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멸치 한 마리”가 아니라 “멸치떼”, “멸치 한 상자”, “멸치 한 가마”입니다. 멸치는 잡히는 즉시 가마솥에 삶아지고, 말려지고, 분쇄됩니다. 이 과정에서 멸치의 생은 완전히 비가시화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방식입니다.
산천어 축제는 사람들이 눈으로 보는 죽음이다?
멸치 산업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죽음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 보는 죽음은 학살이고, 보이지 않는 죽음은 산업인가?
- 축제라는 이름이 붙으면 폭력이고, 가공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중립적인가?
멸치는 대부분 양식이 아니라 자연산입니다. 즉, 인간이 태어나게 만든 생명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생명을 대량으로 포획합니다. 그물에 걸려 압사당하거나, 삶아져 죽습니다. 개체 하나하나의 고통을 상상한다면, 멸치 산업은 그 어떤 축제보다 잔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치에 대한 윤리적 분노는 거의 없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멸치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학살”이라는 단어는 객관적 분석이 아니라 정서적 선택이 됩니다.
3. 낚싯대의 논리, 유료 낚시터는 왜 비판받지 않는가
세 번째 비유는 산천어 축제와 가장 닮아 있습니다. 유료 낚시터입니다.
유료 낚시터는 어떤 곳입니까?
인공적으로 물고기를 길러, 특정 시기에 풀어놓고, 돈을 받고 낚시를 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잡은 고기는 가져가거나, 현장에서 소비합니다. 이 구조는 산천어 축제와 거의 동일합니다.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유료 낚시터가 있는지 한겨레는 파악을 해 봤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유료 낚시터를 “학살의 현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취미”, “레저”,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는 자연 학습의 공간으로 추천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합니다.
- 양식 → 방류 → 인간의 즐거움 → 포획 → 소비
이 구조가 문제라면, 왜 산천어 축제만 문제입니까?
유료 낚시터는 사적 공간이고, 분산되어 있으며, 일상적입니다. 그래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되지 않는다? 이건 좀 논리적 모순 아닌가요?
4. 선택적 분노의 위험성
산천어 축제를 비판하는 글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도시인으로서 자본에 연루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실제로는 책임의 확장이 아니라 책임의 희석으로 끝납니다.
왜냐하면 비판은 여전히 특정 장소, 특정 축제, 특정 지역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다음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당신의 냉장고에 있는 고기는 어디서 왔는가?
- 당신이 먹는 국물의 멸치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 당신이 아이와 함께 간 낚시터의 물고기는 왜 괜찮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산천어 축제만을 “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윤리적 용기가 아니라 윤리적 편의입니다.
5. 결론, 문제는 축제가 아니라, 기준이다
바다의 그물, 멸치의 가마솥, 낚시터의 낚싯대가 허용되는 사회에서,
산천어 축제만을 도덕적 재앙으로 지목하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을 상실한 주장입니다.
윤리는 선택적일 수 없습니다.
하나를 문제 삼으려면, 모두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윤리가 아니라 취향이며,
분노가 아니라 정서적 우월감에 불과합니다.
복잡한 분노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단순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 기준 없는 분노는, 결국 또 다른 불공정일 뿐입니다. 【화천인사이트 발행인, Publisher@hwacheon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