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 사방거리(산양리)의 유구한 역사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이 고즈넉한 마을을 예부터 사람들은 정겹게 ‘사방거리’라고 불렀습니다. 한자의 의미 그대로, ‘사방으로 길이 뻗어 있는 거리’라는 이름을 품은 이곳은 대한민국의 격동적인 현대사 속에서 수많은 삶의 희로애락이 켜켜이 쌓인 이야기의 보고입니다.
필자가 사방거리에 유독 깊은 애착을 느끼는 것은, 1982년부터 1985년 초까지 그곳에서 젊음을 바쳐 군 생활을 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겹겹이 솟아오른 산봉우리와 굽이치는 계곡이 감싸 안은 듯한 이곳은, 대한민국의 최전방이라는 숙명과 함께 뼈아픈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에게는 든든했던 전우들과 젊음의 열정을 바쳤던 소중한 추억이 곳곳에 아롱져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사방거리 이름이 품은 유래부터, 마을이 생긴 동기, 눈부셨던 중흥기, 그리고 피할 수 없었던 쇠퇴의 그림자와 이를 다시 밝히고자 했던 최문순 화천군수의 진심 어린 노력까지, 그 발자취를 따라 차근차근 헤아려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방거리 지명의 유래, 길과 사람이 만나 사방으로 흩어지던 곳
‘사방거리(산양리)’라는 정겹고도 의미심장한 이름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첫 번째 설은 이곳의 독특한 지형과 교통의 요지로서의 역할에서 비롯됩니다. 산양리 일대가 주변의 모든 방향으로 길이 뻗어 있어, 먼 곳에서부터 사람들의 발걸음과 물자들이 쉼 없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는 교통의 심장부였기에 자연스레 ‘사방거리’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왁자지껄한 인파와 물건을 사고파는 활기찬 에너지가 넘쳐흘렀을 그 옛날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합니다.
두 번째 설은 이 지역의 깊은 역사적 맥락과 경제 활동의 생생한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산양역(山陽驛)’이 존재했을 만큼, 이곳은 일찍이 장터와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장날만 되면 발길 닿는 곳마다 오가는 상인들로 북적였고, 그들은 이곳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물건을 교환한 후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사방거리’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설입니다.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활기 넘치는 교류의 현장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가슴 아픈 6.25 전쟁과 연계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쟁의 참화로 마을의 대부분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황폐한 현실 속에서, 오직 ‘사방으로 통하는 길’만이 유일하게 식별 가능한 공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듯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어느 하나만을 진실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보듬고 아우르며 이 지역의 이름에 깃들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게 느껴집니다.
2. 마을 생성의 동기, 전쟁의 상흔 위에 움튼 새로운 삶의 터전
사방거리가 하나의 마을로서 그 모습을 갖추게 된 배경에는 6.25 전쟁 전후로 몰아쳤던 사회적 격변의 아픔과 희망이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집들이 무참히 파괴되면서, 정든 터전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이동과 재정착이 빈번하게 이어지던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일부 지역은 전략적인 요충지로 남아 새로운 공동체가 움트는 씨앗을 품게 되었으니, 바로 산양리(사방거리)가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라는 특수성과 편리한 교통로가 결합된 지리적 이점 덕분에, 복무를 마친 수많은 제대 군인들 중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지친 몸과 마음이 기댈 곳을 찾았고, 인근 지역의 상인들과 장꾼들이 꾸준히 드나들며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발길과 정착 의지가 모여 자연스럽게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근에 주둔한 군부대 병력의 유입으로 인한 수요는 이 마을 성장의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젊은 장병들에게 잠시나마 고단함을 잊게 해줄 유흥 시설, 따뜻한 밥 한 끼를 내어줄 식당, 지친 몸을 뉘일 숙박 시설 등 병영 상권으로서의 필요가 충족되면서, 사방거리는 단순한 농촌 마을을 넘어선 활력 넘치는 ‘병영 상권’의 독특한 색깔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장병들에게는 짧은 행복을, 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특별한 의미의 공동체로 기능했던 것입니다.
3. 사방거리 중흥기 (1960년대~1990년대), ‘전방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리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약 30년간, 사방거리는 그야말로 눈부신 ‘중흥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설명됩니다.
첫째는, 이 지역의 숙명과도 같았던 군사 주둔과 병영 문화의 지대한 영향입니다. 이 시기의 사방거리는 특히 화천 지역에서 ‘전방 장병들의 달콤한 휴식처’로 확고히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 주점, 여관, 그리고 잠시나마 유쾌함을 선사했던 다방 등 장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병영 친화적 업종들이 우후죽순처럼 발달하며 마을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지역에는 활기찬 경제적 움직임과 새로운 인구 유입이 꾸준히 일어났습니다.
둘째는, 교통과 장날 문화의 소중한 전승이었습니다. 예전의 ‘산양역’과 지역 장시(장날)를 중심으로 견고하게 형성되었던 상업 네트워크는 여전히 이 지역과 읍내를 연결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인근에서 나는 신선한 농산물과 풍성한 임산물 등이 사방거리에서 읍내 장날로 연결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 기반이 탄탄하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활기 넘치던 시기의 사방거리는 ‘전방의 라스베이거스’라는 정겹고도 활기찬 별칭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최전방이라는 엄숙한 환경 속에서도, 그곳은 젊은 병사들에게는 짧지만 소중한 휴식과 탈출구를 선사했고, 장병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중요한 수입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간 많은 이들이 가슴속 깊이 간직한 추억을 찾아 다시 그곳 사방거리를 방문하는 훈훈한 일도 적지 않았으니, 이 모든 경험과 기억은 이 지역 사회의 값진 문화적 자산으로 길이 남겨졌습니다.
4. 사방거리 쇠퇴기, 복합적인 변화의 물결 앞에 서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중흥의 시절도 세월의 흐름 앞에선 잠시 머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1990년대 말에 접어들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방거리에도 점차 쇠퇴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쇠퇴는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가느다란 실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듯이, 구조적이고 정책적인 요인, 그리고 사회 전반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찾아온 아픈 결과였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온 변화는 바로 인구 고령화였습니다. 젊은이들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남겨진 노년층은 지역 소상공을 이어 나가는 데 벅찬 부분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쇠퇴의 중심에는 국가의 거대한 군사 정책 변화가 핵심적인 영향을 했습니다.
점진적인 병력 감축과 병사들의 외출·외박 확대 정책은 사방거리의 심장이었던 병영 상권에 돌이킬 수 없는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접경지역의 특성상 위수지역(軍의 작전 및 외출·외박 관할구역) 변경은 지역 경제 전체에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증폭시켰고, 이는 곧 투자와 소비 활동의 위축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때 활기 넘치던 상점들의 불빛은 하나둘씩 꺼져갔고, 거리는 점점 한적해지며 깊은 적막감 속에 잠겼습니다.
5. 사방거리 되살리기, 최문순 군수의 상생과 미래를 향한 담대한 투자
점점 쇠락해가는 지역의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최문순 화천군수는 이 아픈 현실에 맞서 복원과 재생의 노력을 전개했습니다. 최 군수는 ‘지역 활력 회복’과 ‘주민 복지 강화’를 군정의 가장 핵심가치로 삼으며, 문화와 관광, 그리고 교육 인프라를 확충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구체적인 노력으로는, 화천이 자랑하는 독특한 지역 관광 자원을 산업으로 연결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지역 맞춤형 사회복지 및 교육 프로그램(온종일 돌봄센터 등)을 도입하고, 마을 환경 정비와 지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는 상가 리모델링 사업들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어려운 소상공인들을 지원하고 지역 특산물의 브랜드를 강화하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접경지역이라는 사방거리의 특수성을 헤아려, 주민과 군(軍)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협력 모델을 모색했습니다.
국방부와의 끊임없는 대화 채널을 통해 위수지역 문제와 국방부 정책으로 인해 발생하는 주민들의 갈등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병행했습니다.
최문순 군수는 단순히 일시적인 해결책을 넘어, ‘아이 기르기 좋은 화천’, ‘지역 맞춤형 복지·교육’이라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며, 인구 유입을 촉진하고 주민들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머무를 수 있는 정주 여건 개선 전략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사례로는, 아이들의 교육과 돌봄을 책임지는 화천복합커뮤니티센터와 같은 인프라 사업, 화천의 자랑인 겨울 축제를 비롯한 레저 관광 활성화를 통한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습니다.
소상공인들을 위한 정책자금을 지원하고, 상권 활성화 캠페인을 벌이는 등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섬세한 손길도 놓지 않았습니다. 군인가족 아파트 유치, 마을 환경 정비와 관광 안내 개선을 병행해 나갔습니다.
군부대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지역 상권과 병영 문화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현실적 문제 해결에도 앞장섰습니다. 산골에서는 볼 수 없는 DMZ시네마(개봉 영화관) 건립은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뼈아픈 현실이 있습니다. 최문순 군수 이전의 군수와 실무 과장들은 대체 뭘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역 발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사방거리가 쇠락하든, 봉오리가 사라지든 그것은 그들 관심 밖의 일이었으며, 오직 본인의 치적 또는 생색내기 행정으로 일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지방 행정의 연속성과 진정성이 지역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기억과 전환의 장소로서의 사방거리, 다시 쓰는 희망의 서사
화천 사방거리는 단순한 ‘쇠락한 거리’라는 이름표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곳입니다. 그곳은 대한민국의 격동적인 현대사 속에서 펼쳐졌던 수많은 미시적인 장면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적 장소입니다.
참혹한 전쟁과 분단의 아픔, 독특한 병영 문화와 지역 사회의 깊은 유대감, 거대한 산업화의 물결과 사람들의 이동, 그리고 국가의 국방 정책과 지방 자치의 상호작용이 사방거리의 유구한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지명 하나에도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여 있듯이, 사방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 또한 결코 단 하나의 서사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방거리를 다시 되살리는 작업은 비단 물리적인 환경을 정비하고, 관광 자원을 개발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소중한 삶을 굳건히 지탱해 줄 튼튼한 경제 기반을 다지고, 젊은 세대가 다시 찾아와 행복하게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며, 군과 지역 사회 사이에 더욱 깊고 단단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앙 정부의 정책과 지방의 생생한 현실을 유기적으로 잇는 제도적인 완충 장치가 함께 제대로 작동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부활을 꿈꿀 수 있습니다. 최문순 군수와 화천군이 그동안 끈질기게 추진해 온 다양한 사업들은 바로 이러한 커다란 목표를 향한 희망의 발걸음입니다.
앞으로 사방거리가 단순한 ‘추억의 장소’로만 남지 않고, 지역 주민들과 이곳을 찾는 모든 방문객들에게 새로운 활력과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찬란하게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화천인사이트 발행인, Publisher@hwacheon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