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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 전적비가 가평에도 있는 이유

경기도 가평을 찾는 이들 가운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묻습니다. “파로호는 강원도 화천에 있는데, 왜 여기에 ‘파로호 전적비가 이곳에 있지?” 라는 질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지리적 착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6.25전쟁사를 이해하는 우리의 관점, 기억의 층위, 역사적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태도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가평의 비석은 과연 잘못된 위치에 세워진 것일까? 우리는 왜, 어떤 맥락에서 그곳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비석이 자리 잡았는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기도 가평 파로호 전적비

화천 파로호 전적비, 승전의 결과를 기리는 자리

먼저 대한민국에서 ‘파로호’라는 이름 자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보면 문제의 출발점이 선명해집니다. 파로호(破虜湖)는 6.25 전쟁 중인 1951년 5월 26일∼28일에 벌어진 파로호 전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전투는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워 승리를 거두고 후퇴하는 중공군을 화천호 일대까지 추격해 엄청난 피해를 입힌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용문산 일대 전투와 연계되어 있으며, 전선은 양평과 가평, 춘천을 거쳐 화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강원도 화천군 화천호 일대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의 ‘파로호’로 명명했습니다. 이러한 명명은 공식적인 승전 표상이며, 1955년에 비석 제막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이 비석은 처음에는 파로호 현장 부근에 세워졌고, 이후 여러 차례 위치가 조정되었으나(현재 파로호 취수구 인근에 위치) 변함없이 화천 파로호 일대가 전투의 ‘결과’와 ‘기념’의 장소로서 기능해왔습니다.

파로호 전적비 제막식 상상도
1955년 파로호 전적비 제막식(상상도)

건립 시기와 위치

  • 위치: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파로호 인근
  • 건립 시기: 1955년 이승만 대통령 명명 및 기념비 제막식 거행
  • 의미: 파로호 전투의 종착지, 충돌의 결과로서 중공군을 궤멸시키고 승리를 확정한 역사적 현장

전쟁사에서 전투의 종착지를 기념하는 장소는 그 자체로 상징성이 강합니다. 승리의 결과를 한 점으로 고정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천 파로호 전적비는 곧 ‘승리의 지점’을 의미합니다.

화천 파로호 전적비

가평 파로호 전적비, 승전의 시작점

그렇다면 왜 가평에도 파로호 전적비가 있을까요? 화천에서 벌어진 전투의 비석을 복제해서 가져다 세운 것일까요?

가평에 세워진 비석은 파로호 전적비의 단순 복제품이 아니라, 파로호 승전의 원동력이 된 전투의 ‘출발점’을 기리는 표식입니다. 특히 이 비석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 일대에 있는 ‘용문산 전투 가평지구 전적비’ 옆에 있습니다.

가평 설악면 일대는 1951년 당시 제6사단이 중공군의 공격을 가장 먼저 저지한 전초 방어선이었습니다. 특히 6사단 2연대는 중공군의 공세를 약 3일간 사투 끝에 막아냈고, 이 승리는 이후 용문산 본 전투에서의 반격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조건이었습니다. 그 결과 용문산에서의 반격은 곧 화천으로 이어져 파로호 승전으로 연결됐습니다.

가평의 전적비에는 위에 언급한 내용이 자세히 새겨져 있습니다. 설악면 천안리 98번지에 자리한 가평 파로호 비석은 화천군에 있는 원래 비석을 탁본하여 복제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건립 시기와 위치

  • 위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 일대 ‘용문산 전투 가평지구 전적비’
  • 건립 시기: 1997년 6월 23일, 가평군에서 건립
  • 의미: 용문산 전투 및 가평 전선에서의 방어전과 추격전이 파로호 승리에 기여한 ‘시작점’을 기념

이 비석은 단지 화천의 결과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파로호 승전의 역사적 토대가 된 가평 전투의 희생과 공로를 기리는 의미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 점에서 화천과 가평의 두 전적비는 역사적 의미가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전적비의 비교, 맥락과 상징

항목화천 파로호 전적비가평 파로호 전적비
위치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파로호 인근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
건립 시기1955년 전후 (이승만 대통령 명명 및 제막식) ([위키백과][1])1997년 6월 23일 가평군 전적으로 조성 시 ([PeakD][4])
기념 의미파로호 전투의 최종 승전지 및 결과파로호 승전의 전초전이자 시작점, 용문산 전투 기념
역사적 맥락파로호 전투 종결점, 중공군 격파의 상징용문산~가평 전선에서의 방어/추격이 승리로 이어진 과정

이 비교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두 비석이 서로 경쟁하거나 중복된 기억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의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천 전적비가 승리의 결말을 기념한다면, 가평 전적비는 그 승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기록합니다.

오해와 역사 인식의 문제

가평의 비석이 ‘위치가 잘못됐다’는 비판은 전투가 화천에서 벌어졌다는 사실만을 기준으로 한 오해입니다. 역사에서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지 못하면, 기록은 왜곡되고 기억 또한 왜곡됩니다. 전적비는 단지 지리적 표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건을 ‘어디에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가평의 비석에는 “여기서 싸워 이겼다”가 아니라 “여기서 싸워 승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전투는 단절된 점이 아니라 연속된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용문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그 흐름은 가평을 거쳐 춘천과 춘계 공세의 반격으로 이어졌습니다. 끝내 화천에서 전투는 결말을 맺었습니다. 두 전적비는 이 흐름의 앞과 뒤를 함께 기록하는 역할을 합니다.

맺음말

역사의 기억은 단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과정과 결과가 교차하는 지점마다 생겨납니다. 화천 파로호 전적비는 승리의 순간을 기억하게 합니다. 가평 파로호 전적비는 우리가 그 승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기억하게 합니다. 두 비석은 서로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온전히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의 기록인 것입니다.【화천인사이트 발행인, Publisher@hwacheonin.com】